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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관창

by #!-- 2019. 4. 30.

계백

계백의 의자왕 때 사람으로 백제 말기에 백제를 지키던 장군이다. 660년에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이 5만여 연합군이 백제를 쳤다. 백제의 주요지인 탄현으로 공격했다. 5000명의 결사대를 뽑아 황산벌에서 맞섰다. 황산벌은 지금으로 치면 충청남도 연산으로 논산에 있던 곳이다.

 한 나라의 힘으로 나, 당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있다.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여 식구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하였다. 병사들에게 옛 월왕 구천은 5000명으로 오왕 부차 70만명을 무찔렀다. 승리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하며 험한 곳에서 먼저 차지해 세 진영으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5만군을 5천군으로 대항했으니 오죽했을까.

 결사대 5000명의 용맹 연합군의 대군을 압도할 만했다. 처음 전투에선 네번에 걸쳐 승리했다. 그러나 반굴, 관창 등 젊은 화랑의 전사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과 대적하기에는 수적으로 불리했다.

  결국 백제군은 패했다. 계백은 최후를 맞이했다. 후대에는 계백이 높이 칭송되었다. 조선 유학자에게는 충절의 본받아야할 인물로 여겨졌다. 권근은 계백이 가족을 먼저 죽인 것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패했다고 분석했다. 잔인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풍토였고 수적으로 분리한 계백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 연산의 충곡서원에서 제향된다.

  그의 기록이 있는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사강목, 전고대방, 조선명인전, 한국의 인간상, 인물한국사 사학지 등이 있다.

 

관창

신라는 화랑으로 유명하다. 젊은 인재들을 모아놓고 교육 등을 한 것이다. 신라 화랑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건 관창과 반굴이다.  이들은 희생을 했고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제와 팽팽히 맞서싸운때 신라 승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의 희생으로 삼국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반굴은 김흠순의 아들이다. 김유신 장군의 동생이 김흠순이다. 그러니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이며 사위 신분이다. 김흠순의 업적으로는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여 업적을 세웠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전투가 패했으나 홀로 살아 돌왔다. 그래서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

  관창의 아버지는 김품일이다. 관창은 활을 잘 쏘고 행동이 남달라 화랑으로 추천됐다. 15살에는 대신들의 추천으로 태종 무열왕에게 부장으로 임명된다. 이로써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관창, 반굴과 많은 화랑들이 백제를 무너뜨리려 황산벌에 나선다. 김유신, 김흠순, 김품일 등 많은 장국들이 신라에서 나섰으나 백제의 계백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황산벌에서 맞붙었으나 신라는 4번이나 패하고 만다. 그럼에 따라 군기도 떨어졌다. 김흠순의 지지로 반굴이 신라에 돌진하나 전사한다. 관창은 잡혀 계백의 앞에 잡혀가나 어린 나이기에 돌려보내라 하지만 치욕으로 여겨 다시 백제에 돌진한다. 다시 쳐들어와 관창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신라군은 불타오른다. 사기가 오르고 총공격으로 황산벌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1] - 백결선생 / 의자왕

[1] - 신라 이사부

[1] - 동명왕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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